홍세화 「생각의 좌표」
11.30

나의 20대.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을 위해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20대의 젊음은 분출하는 욕망과 삶을 향한 벅찬 기대, 그리고 낭만적 사랑에 대한 예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시절에 20대를 맞아야 했던 우리 세대는 억압된 욕망과 자유 그리고 인간과 삶에 대한 회의의 시작을 의미했다. 대신에 우리에겐 자유와 민주의 복원에 대한 열정과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의 열망이 있었다. 영혼의 자유로운 활보가 가능한 세상을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살아갈 날을 길게 남겨두고 있는 젊은이의 호기로움이며,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받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젊은이의 손상되지 않은 생명력이었다.

 

인간에 대한 본원적 질문과 고민을 주저없이 할 수 있게 한 것 또한 젊음이었다. 엄혹한 상황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차라리 낭만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능청스러움이 젊은 패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난하지만 생활에 대한 구체적 압박감이나 의무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시기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나름의 삶을 영위해야 하는 출발점에 선 젊은이의 기대와 전망은 개인의 삶과 연관된 모든 문제와 단호히 맞설 수 있게 하고, 타협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한다. 때론 그 결연함이 생활의 팍팍함에 지치고 병들어버린 기성세대에게는 '개도 안 물어갈 순수함'으로 희롱 거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변형되기 전 본래의 우리가 삶을 대하는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충실하게 젊음을 향유했다고 말할 수 있다. 출발선에 선 내게 주어졌던 삶의 얼개가 아무리 형편 없었다고 한들 결코 주저앉지 않게 한 것 역시 젊음과 무관하지 않다. 나에게 젊음, 그것은 항상 저항이라는 단어와 함께한다. 애당초 '사는 게 다 그렇지 별거겠어', '둥글 둥글 살아야지' 라는 기성세대들의 서글픈 비책에 나는 죽는 날까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기성세대들의 말처럼 결고 한 번쯤은 마음 가는 대로 살아봐도 될 만한 물리적 여유에서 나오는 객기가 아니다.

 

기성세대들이 소시민적 일상에 타협하고 매몰되면서 잃어버린 인간의 자유로움을 향한 열정 때문이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자아실현에 있지 기름진 생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인에게 자유는 마지막 눈동자를 그려넣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초상화처럼 모든 생명을 진정 살아 있는 것으로 완결시킨다. 억압을 지배하기 위한 주요 기제로 하는 사회일수록 자유는 그 자체로 불온을 의미한다. 오랜동안 자유의 불온성이 강조되었다. 인간의 역사를 자유에 대한 극심한 왜곡과 핍박에 저항한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절실하고 절박한 것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는 곧 나를 억압하는 사회다. 개인은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사회가 어떻든 나만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런 자유는 지금의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대해 '도대체 그 법이 있든 없든 아무런 불편이 없는데 왜 이 소란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자유처럼 수상한 것이다. 자유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로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된 사람을 보고 완벽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축하하지 않는다. 이는 자유의 상대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성을 말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자유 역시 사회적 제 관계 속에서 지나치게 구체화되고 개별화되어 마치 상대적 가치인 양 그 실용성이 강조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잊어버려선 안 된다.

 

영악스럽지는 못했지만 이 세상에서 반인간의 수상쩍은 기미를 알아챌 수 있는 맑은 영혼이 남아 있기를 바랐다. 불의를 감지하고 않을 수 없었고 '무모한 저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살았다. 영혼을 떠나보내지 않고, 그래서 아픔은 있었지만 후회는 없다.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 남을 것이지만.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올 것이며,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기 성숙의 모색을 게을리하지 말라. 자아실현을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 이성의 성숙 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 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다시금 강조하건대, 그것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가에 달려 있다.

 

생각의 좌표,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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